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울음
歲寒圖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가지 끝 위로 치솟으며 몸놀림하는 까치 한 쌍
이 여백에서 폭발하는 울음...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낸다
고목나무 가지 끝 위에 까치집 하나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
한 폭의 그림이
질화로 같이 따숩다.
- 송수권(1940~) 시집 "지리산 뻐꾹새" 에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옛 문인화는 그림 이전에 글이었다. 그래서 옛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讀畵’, 즉 읽는다. 옛 그림은 접은 흔적이 있다. 서양화에 익숙한 현대인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림을 구기다니. 그것은 그림이 하나의 감상의 대상으로라기보다는 정신을 표현하는 글의 다른 형식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따라서 先代의 그림이란 ‘그림의 형식을 빌어온 글’이라 할 만하다. <세한도>에는 염량세태의 모질고 차가움이 있다. 쓸쓸한 화면엔 여백이 많아 겨울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허름한 집 한 채와 나무 네 그루뿐이다. 옛적 추사 문전에 버글거렸을 뭇사람들의 모습은커녕 인적마저 찾을 수 없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中에서) 유배지의 절해고독 속에서 그려진 추사의 그림을 보는 것은 글로 씌어진 그의 내면을 읽는 것과 같다. 그것은 주변부로 추방당한 고고한 선비의 고독과 쓸쓸함이다. 그리고 그것을 견뎌내는 자의 堅定한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傳言이다.
이 그림은 네그루의 소나무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엔 허름한 집 한 채. 붓이 가지 않은 땅에는 차가운 눈만이 쌓여 있고 그 눈이 잇닿은 허공 역시 하늘인지 땅인지 모르게 비어져 있다. 그런데 이 나무들은 줄기가 하늘을 향해 곧게 서 있다. 휘드러진 풍류 남아의 소나무가 아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소나무. 그것은 완당의 고고한 정신이다. 외양은 허술하나 속은 도도한 옛 선비들의 정신 세계가 그 나무에 있다.
세상 인심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유배지에서 권력으로부터 버려진 모진 세월을 감내해야 했던 완당의 마음은 그래서 씁쓸하다. 그래서 그의 제자 이상적은 <세한도>를 받아보고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오주석 윗글)’라고 답장을 올린다. 시인은 이러한 <세한도> 한 폭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아득한 과거의 ‘그’와 시인은 만난다. 완당의 절대 고독이 그에게 스며든다. 온몸이 추워지고 그 고고하면서도 인간적인 그의 고뇌가 시인을 감싸기 시작한다. 시인은 이미 그의 제자 이상적이 되어 다시 그림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먹붓을 들어 빈 공간에 선을 하나를 찍어 누르고 긋는다.
그림 속에 그려진 두 개의 세계
우리 옛 그림에는 서양화와는 다르게 여백이 있다. 물론 불세출의 서양 조각가 가운데 한 사람인 로댕의 조각 가운데는 미완성인 채로 남겨진 걸작들이 있다. 그러나 그 조각들은 자연적인 것과 인위적인 것의 구별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옛 그림의 여백은 그 자체가 뚜렷하게 인위적으로 독립되어 있지가 않다. 노자를 빌어서 말한다면 ‘없음[無]’도 ‘있음[有]’이다. 다시 말해서 여백도 하나의 그림이다.
옛분들은 자연을 겉태로 보지 않고 그 마음으로 보았다. 특히 하늘은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하늘은 지극히 큰 것으로 온갖 생명과 도덕의 원천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주석의 옛 그림읽기의 즐거움 中에서 다시 인용
따라서 <세한도>에는 형이상학적인 여백의 세계와 형이하학적인 실체의 세계가 共存한다. 곧게 높이 하늘로 상승하는 소나무의 줄기는 정신이다. 허름한 현실 속에 구속도 이 무한한 여백의 확장 속에서는 몹시 초라한 것이다. 그것은 완당의 지고한 정신을 구속하기에는 터무니없이 하찮은 것이다. 그러나 그 여백은 비어 있다. 황량함의 연속. 없음도 있음이라면 그러한 여백은 황량하기 그지 없는 완당의 내면과도 상관이 있을 터이다.
시인은 빈 공간에 선을 낸다. 소나무 가지 끝 위로 치솟는 까치 한 쌍이다. 그 순간 소나무 위로 감추어져 있던 또 하나의 하늘이 열린다. 그 황량한 여백은 무한대로 확장하기 시작한다. 堅定하게 억제되던 완당의 울음은 까치 울음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증폭된다. 고요하게 억제된 도도한 정신은 처음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환생한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운다는’ 사실일 것이다. 울지 못하는 인간처럼 황량하고 불행한 것이 있을까. 더구나 시인은 그 울음은 ‘폭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나무 위에 무겁게 얹혀진 殘雪은 순간 그 폭발음에 지상으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오열 하나가 온 세상을 흔들고 있다.
<세한도>는 고요한 내면이 만들어 놓은 정적의 세계다. 시인은 세한도의 그 정적을 일시에 깨뜨린다. 그 여백과 그려진 실체가 주는 황량함을 참을 수 없었으리라. 그림 속에 은거한 완당. 허름한 집 속에 기거한 완당의 늙은 기침 소리. 그 외롭고 쓸쓸한 절해 고독을 시인은 위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방법은 울음을 울음으로써 치유하는 것. 따라서 시인은 靜的인 여백의 세계를 순식간에 動的으로 바꿈으로써 슬픈 황량함을 극대화시킨다.
클림트-삶과 죽음
삶과 죽음의 경계는 지워지고
시인은 다시 한 번 먹붓을 든다. 이번에 그가 그린 것은 까치집 하나이다. 이 까치집은 비어 있다. 즉 버려진 집이다. 그때 여백의 공간은 가일층 확장된다. ‘더 먼 저승의 하늘’이 그것이다. 삶의 세계가 죽음의 세계로 확장되면서 그 여백은 삶과 죽음을 하나로 만든다. 저승의 하늘에서 폭발하는 울음을 산 자인 그가 듣고 있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 경계가 지워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시인이 그려 놓은 집은 ‘죽은 자의 집’이다. 산자의 세계 속에 남겨진 죽은 자의 집. 이것은 무엇인가. 그 까치집은 살아 있는 까치의 집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까치가 남기고 간 집이다. 집이란 흔히 안식의 상징이다. 산자들이 삶의 고단함을 늘어놓고 편히 쉴 수 있는 것. 그것이 집이다. 그러나 ‘더 먼 저승의 하늘’에서 우는 죽은 자의 집은 삶의 세계에 있다. 결국 시인은 죽은 자의 안식처가 삶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가 결코 단절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가 쉴 곳이 산 자의 집이라면 삶과 죽음은 이미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라는 말이다. 곧 삶이 죽음이고 죽음은 삶이다.
흔히 죽는다는 것은 ‘상실’의 다름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망자의 사진 앞에서 수도 없이 울어대는 산자들의 울음소리를. 그것은 삶이 끝나버렸다는 절망감. 그리고 죽은 자는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는 不在의 인식론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김소월의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초혼>의 외마디 설움은 단절화된 세계관의 정서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삶과 죽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1연의 살아 있는 까치의 울음은 2연의 죽어버린 까치의 울음과 만난다. 生은 死이고 死는 生이라는 인식. 그것은 차라리 불교의 생사관에 가깝다. 도도한 유교적 관념을 불교적 생사관으로 확장시킨 이 시는 그래서 짧은 시구 속에서도 거대한 談論으로 읽힌다. 그래서 시인의 또 다른 시 <智異山 뻐꾹새>나 <山門에 기대어>에서 보이는 기나긴 인연의 울음은 불교적 인연론의 시적 체화가 된다.
이승의 까치 울음과 저승의 까치 울음을 연결시킴으로써 시인은 삶과 죽음을 이어놓는다. 시인에게는 삶과 죽음은 단절이 아니다. 죽음 역시 삶의 연장이요 시작이다. 그래서 시인에게 비춰진 <세한도>는 ‘따숩다’. 한 세상이란 죽음과 삶이 서로 껴안고 있으므로. 그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므로. 삶은 죽음에서 위안을 받고 죽음은 삶에다 집을 짓고 위안을 받는다. 옛 선비들의 고고한 정신 세계로서의 여백이 시인에게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껴안고 있는 무한공간이 된다. 삶의 지고한 堅定과 여유로서의 여백이 生死를 포괄하는 세계로서의 공간으로 재해석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시를 볼 때 절망한다. 生의 이치조차 낯설은 내게 이런 시는 버겁다. 그러면서 모래알보다 작은 나를 자꾸만 반성하게 한다. 너는 지금 어디까지 가고 있느냐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느냐고. 나는 울고 싶어진다. 시인이 다시 그린 <세한도> 한 장을 놓고 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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