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음대로 시를 읽다

하나의 사물 세 개의 시선

 

 

하나의 사물 세 개의 시선
                                -흔적, 구속과 자유

 

 

 

 

A Pair of Shoes, 1885, Oil on Canvas 37 x 45cm, Vincent Van Gogh

화실에는 커다란 징이 박힌, 진흙 범벅의 다 닳아 해진 한 켤레의 구두가 있었는데 고흐는 그것으로 대단히 훌륭한 정물화를 그렸다. 나는 내가 왜 이 낡은 유품 뒤에 어떤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내어, 다른 사람이라면 고물 장수의 망태기에나 던져버렸을 물건을 그토록 존경심을 갖고 지니고 있는 이유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말했다. "내 아버지는 목사였소. 아버지의 권유로 나는 장래의 직업을 준비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였고 어느 맑은 아침, 나는 젊은 목사가 되어 가족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로 벨기에로 떠났소. 내가 배웠던 대로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이해한 대로 공장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소. 당신이 보는 이 구두는 그 여행의 피로를 용감하게 견뎌 주었다오."
- 구두에 대한 고갱의 질문에 대한 고흐의 회상 中에서


사물은 痕迹(흔적)으로 이야기한다

집에 최승호의 <대설주의보>라는 시집이 있다. 민음사 초판간이니까 꽤 오래된 시집이다. 그리고 김현 선생의 <상상력과 인간>, <反詩 동인> 한정 초판부도 가지고 있다. 이 책들은 너무 낡아버려서 페이지마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되어 있다. 이 책들을 넘기면 젊은 시절 수없이 많은 낙서가 함께 실려 있다. 그것들은 나의 시계를 멈추고 추억의 공간 속으로 나를 이끈다. 더구나 최승호 시인의 시집은 대학시절 반지하 집에 살 때 수해 때문에 물에 실린 자국들도 있다. 군데군데 책장이 부푼 곳마다 번진 펜의 흔적이다. 오래된 사물들은 이미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억’이다.

고흐의 <끈이 달린 구두>는 우선 낡았다. 그 낡은 구두의 주인이 누구인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여행자일 수도 있고, 농부나 노동자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 ‘구두’가 지금 눈앞에 놓여져 있다는 사실 뿐이다. 예술 작품을 바라본다는 것도 그와 같다. 누가 썼는지 누가 그렸는지보다 ‘어떤 의미를 갖는 것으로 체험되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시를 볼 때 어떤 것이든 ‘괄호’를 치고 읽는다. 그때 앞에 놓인 사물은 ‘存在’로 전환된다. 즉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하나의 능동적인 의지를 가진 주체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를 현상학에서는 ‘판단정지’라고 부른다. 그럴 때 시는 하나의 존재로 독립되고 그 시의 은은한 작가의 목소리를 통해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시는 ‘고립된 망’이 아닌 담론화된 ‘열려진 관계의 망’ 속에서 살아날 수 있다.

닳아 삐져나온 신발 도구의 안쪽 어두운 틈새로부터 노동을 하는 발걸음의 힘겨움이 굳어 있다. 신발 도구의 옹골찬 무게 속에는, 거친 바람이 부는 가운데 한결같은 모양으로 계속해서 뻗어 잇는 밭고랑 사이를 통과해 나아가는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의 끈질김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다. 가죽 표면에는 땅의 축축함과 풍족함이 어려 있다.
해가 져물어감에 따라 들길의 정적감이 신발 밑창 아래로 밣혀 들어간다. 대지의 침묵하는 부름, 무르익은 곡식을 대지가 조용히 선사함 그리고 겨울들판의 황량한 휴경지에서의 대지의 설명할 수 없는 거절이 신발 도구 속에서 울리고 있다.
- 고흐의 그림에 대한 하이데거의 대답 中에서

하이데거가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불렀던 방식이다. ‘사물에의 말 걸기’를 통해 존재를 드러내서 체험화하는 것이다. 구두 내지 구두를 그린 저 그림(존재자)을 통해서 ‘존재’가 말을 걸어오는 온다. 일상적 삶 속에서 잊고 은폐되었던 사물의 ‘진리’를 드러내는 이러한 방식은 사물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다. 이와는 다르게 후설은 ‘지향성(Intention)'에 주목한다. 후설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농부의 구두‘를 떠올린 것은, 상실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꿈에 대한 의식의 지향성 때문이다. 결국 후설은 체험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선험적 자아에 주목한 것이다. 체험되는 대상을 통해서 존재가 말을 걸어온다는 점에 주목한 하이데거와는 상반된 방향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상학적 감상은 ’세계를 보는‘ 그리고 ’대상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일깨운다.


Oil on canvas 44.0 x 53.0 cm. Arles: August, 1888.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버려진 구두 한 짝
이재무


공터 한 구석 버려진 구두 한 짝에 주목한다
저 사내가 걸어온 생을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저이도 그 누구처럼 태어나 세상을 사는 동안
생의 매순간 목숨 값 치르며 살아 왔으리
금 간 벽돌의 손으로
방 벽 치며 울던 때 있었으리
신목에 목맬 줄 달고 싶었던 때 왜 없었겠는가
생의 오후를 살던 어느 날 아내 따라
교회 십자가 앞 무릎 꿇고 통한의 긴 기도 올리기도 하였으리
더러 꽃으로 활짝 펴서 다친 마음들
위무하던 날 있었으리
가지 말아야 할 곳 다녀와서 회한의 쓴 소주로
생나무 타듯 연기 자욱한 울분 달래고
꼭 다녀와야 할 곳 가지 못하여
물 묻은 종이로, 가슴 찢어지는 아픔 있었으리라
그는 참으로 바지런히 주어진, 제 운명의 가파른 길
걷고 또 걸으며 오래 입은 외투처럼 낡아갔으리
하지만 그가 지킨 약속 그가 행한 선행은
오늘 밤 순도 높은 별꽃 되어
누군가의 쓸쓸한 밤길 밝히리라
그러하니 그대여 그대의 가난은 결코 외롭지 않다
그대의 지난 생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공터 한 구석 다 해진, 늘그막에 홀로 된 신을 주목한다
남루했으나 그런대로 보람 있었던
한 사내의 전기를 나는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이 시의 화자는 구두 한 짝을 보고 있다. 그것은 ‘버려진’ 것이다. 나는 그 버려진 구두 한 짝을 보며 한 사내의 지나온 삶을 상상한다. ‘버려진 구두 한 짝’은 불완전한 흔적이다. 두 짝이 아닌 한 짝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내의 걸어온 생은 ‘금 간, 울던, 통한, 회한, 울분, 찢어지는 아픔, 낡’은 것이다. 그 흔적이 버려진 구두 한 짝에 있다. 화자는 구두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흔적들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밝기보다는 어둡다.

그렇다면 화자는 왜 그 낡은 구두에서 그러한 흔적들을 보는가. 그것은 그의 상상력이 버려진 낡은 구두의 의미망에 섞여 들어가기 때문이다. 구두의 삶과 자신의 삶의 중첩. 그 속에 화자가 있다. 즉 화자는 자신의 체험을 사물에 중첩시켜며 스스로 內化된 자신의 체험으로 구두의 여백을 채운다. 그럴 때 구두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화자의 체험과 동일화된다. 한 사내는 결국 화자의 先驗 이미지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버려진’을 읽으며 나는 두 가지의 중의적인 다의성을 발견한다. 그것의 하나는 ‘구두=한 사내=화자’가 동일하게 존재화 된 상황진술이다. 버려진 구두나 시 속의 한 사내나 나는 버려진 존재이다. 그 존재들의 지난 시간은 불행하다.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다녀’와야 하고 ‘꼭 다녀와야 할 곳’은 가지 못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버려졌다. 다른 하나는 ‘한 사내=화자’가 대상(구두)를 버렸다는 사실이다. ‘걷고 또 걸으며 오래 입은 외투처럼 낡’은 구두를 그는 버린다. 그럼으로써 ‘별꽃’이 되어 밤길을 밝히고 아름다운 지난 생의 위로가 온다.

예술은 흔적이다. 시쓰기도 하나의 흔적이다. 사물과 삶에 대한 흔적을 선체험화해 보는 것. 그럼으로써 자신의 빈 인식의 場을 채우는 행위. 그것을 이 시는 보여준다.

이중섭 《새장 속에 갇힌 파랑새》

사물에 갇히기 혹은 자유로워지기


구두
송찬호


나는 새장 하나를 샀다
그것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작은 감옥이었던 것

처음 그것은 발에 너무 컸다
한동안 덜그럭거리는 감옥을 끌고 다녀야 했으니
감옥은 작아져야 한다
새가 날 때 구두를 감추듯

새장에 모자나 구름을 집어넣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새장에는 조그만 먹이통과 구멍이 있다
그것이 새장을 아름답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 새 구두를 샀다
그것은 구름 위에 올려져 있다
내 구두는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한 척의 배

한 때는 속박이었고 또 한 때는 제멋대로였던 삶의 한 켠에서
나는 가끔씩 늙고 고집 센 내 발을 위로하는 것이다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통 같은 구두를 벗고
새의 육체 속에 발을 집어넣어 보는 것이다


나는 구두를 산다. 아니 새장을 산다. 그것의 용도는 ‘작은 감옥’이다. 날뛰는 내 발을 집어넣기 위해 만든 감옥. 그것이 구두이다. 화자는 ‘구두=새장=감옥’이라는 의미망 속에 독자를 끌어들인다. 그러면 그 감옥이란 무엇인가. 우선 그것은 ‘덜그덕거리’고, 발에 너무 커서 맞지 않는 것이다. 그 상태로는 걷는 것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적당히 작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발’은 ‘새’로 읽힌다. 새장은 새를 가두는 곳이니까. 새장이 구두라면 발은 새이다. 그런데 그 새(=발)은 ‘언덕을 잊고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다. 먹이통을 통해서 음식을 받아먹고 구멍을 통해서 바깥으로 숨만 쉬면 되는 것이다. 그 먹이통과 구멍이 새장을 아름답게 한다. 날지 않으면 새가 아니다. 새는 날아야 새이다. 발은 그 새가 되고 싶으나 새장이 아름답다. 현실의 아름다운 규제가 나를 잡아묶고 있는 것이다. 새장은 날기에 충분히 작아야 하고, 구두는 걷기에 충분히 맞아야 한다. 동안 나의 발은 그 맞지 않는 구두를 고집스럽게 신고 살아온 삶이었다. 한때는 ‘속박’이었고 한때는 ‘제멋대로였던’ 삶. 그렇게 살아온 내 발은 나의 지친 영혼의 흔적이다.

구두 하면 친숙한 소설이 하나 있다. 윤흥길의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가 그것이다. 날마다 광을 내고 먼지 하나 묻지 않게 소중히 간직하던 구두 아홉 켤레. 그 구두는 작중인물 권씨의 자존심의 표상이다.

문간방 툇마루에 앉아서 권씨가 구두를 닦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가 솔로 먼지나 떠는 정도의 일을 하고 있었다면 나는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바탕과 빛깔이 다르고 디자인이 다른 갖가지 구두를 대여섯 켤레나 툇마루에 늘어놓은 채 그는 떨고 바르고 닦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거 팔 겁니까?” 아침 인사 겸 농담 삼아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팔 거냐구요?” 갑자기 일손을 멈추더니 그는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내가 신고 있는 구두를 유심히 쏘아보는 것이었다. 이윽고 내 바짓가랑이와 저고리 앞섶을 타고 꼬물꼬물 기어올라오는 그의 시선이 마침내 내 시선과 맞부딪치면서 차갑게 빛났다. 그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어느새 입가에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떻게 보고 하시는 말씀인지는 모르지만…….”<中略>
비계 바루 밑까지 접근해서 사내의 얼굴을 재삼 확인한 다음 나는 이렇게 외쳤다.
“권선생, 거기 있는 게 권선생 아니우?”
그 순간 벽돌장 하나가 똑바로 내 머리를 겨냥하고 무서운 속도로 낙하해 왔다. 잽싸게 몸을 피했기 때문에 다치지는 않았다. 서둘러 널다리를 내려온 권씨가 내 앞에 섰다. 정말 권씨였다. 그의 얼굴에 석고처럼 굳게 새겨진 경악을 보고 나는 그가 나를 죽일 작정으로 그러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는 전신이 땀과 먼지 범벅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베이지색 와이샤쓰 위에 받쳐입은 춘추용 해군기지 잠바는 작업에서 얻은 오손과 주름으로 말씀이 아니었다. 그러나 구두만은 여전해서 칠피가죽에 공들여 올린 초컬릿빛 광택이 권씨의 가장 권씨다움을 외롭게 지켜 주고 있었다. <中略>
어떤 근거인지는 몰라도 구두의 손질의 정도에 따라 그의 운명을 예측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구두코가 유리알처럼 반짝반짝 닦여져 있는 한 자존심은 그 이상으로 광발이 올려져 있었을 것이며, 그러면 나는 안심해도 좋았던 것이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로 남은 구두 中에서

송찬호의 <구두>나 윤흥길의 <구두>에서 공통되는 것은 그 사물이 주는 구속력이다. 송찬호의 시에서의 구두는 ‘감옥’이다. 그러면 윤흥길의 <구두>는 무엇인가. 그것 역시 권씨의 ‘자존심이 만든 감옥’이다. 그 둘은 공히 과거의 것이다. 그 과거의 흔적이 현재를 옭아매는 형국을 두 작품은 보여준다. 詩의 ‘나’는 언덕과 보리 이랑을 세지 않으며 날지 않는 현실에 속박되어 있고, 小說의 권씨는 과거의 빛나는 구두코의 자존심과 현실의 괴리 속에 갇혀 있다.

하지만 이 둘은 그것들을 전환시킨다. 권씨와 詩의 ‘나’는 그 오랜 감옥의 흔적을 버리는 것이다. 詩의 제4연은 1연의 되풀이에 변화를 준다. ‘나는 오늘 새장을 샀다’가 ‘새 구두를 샀다’로 반복된다. 새 구두를 샀으므로 그는 헌 구두를 버린다. 그것은 ‘오래 쓰다 버린 낡은 목욕탕’이다. 그리고 나의 발은 ‘새의 육체’ 속으로 들어간다. 새장이 아닌 맨발 그대로 나의 영혼은 새의 날개를 다는 것이다. 일상으로부터의 飛翔. 새로운 삶의 흔적을 위한 몸바꾸기이다. 운명을 예측할 수 있으리만치 사물과 동일화된 권씨의 끝은 ‘구두를 버리는 것’이었다. 시의 화자 역시 버린다. 그러나 권씨가 구두를 버림으로써 현실 속으로 환원되는 것과는 다르게 詩 속의 ‘나’는 그 현실에서 비상한다. 하지만 ‘나’ 역시 그 끝은 알 수 없다. 그 새가 날아오를 수 있을지 없을 지는 자신의 영혼이 선택하기 때문이다.

송찬호의 <구두>가 새장으로 지칭된 감옥이라면, 이러한 인식의 다른 한편에 장석주의 ‘감옥’이 있다. 그 감옥은 아버지로부터 온다.


Pairs of Shoes, Paris, December 1886
Oil on Canvas, 49 x 72 cm Fogg Art Museum, Harvard University

아름다운 구두
장 석주


나는 날마다 구두를 먹는다
구두는
내 몸 속에서 암세포처럼 자란다
구두는 구름이고
구두는 내 애인이고
구두는 내 감옥이다
날마다 몸 속에서 자라나는 구두는
어느 날 다시 입으로
콧구멍으로 튀어나온다
오오, 저 구름보다 더 아름다운 어둠인 구두
내 가슴팍을 짓눌렀던 아버지의 구두
내 몸의 구멍들은 날마다
수천 켤레의 구두들을 게워낸다

나는 날마다 구두를 먹는다. 그것은 암세포 같은 것이다. 자란다. 따라서 그것은 병적이다. ‘구름, 애인, 감옥’인 구두. 그 구두는 ‘아름답지만(=아름답지 않다)’ ‘내 가슴팍을 짓눌렀던 아버지의 구두’이다. 화자에게 구두는 아름다웠고(구름), 사랑스러웠고(애인), 동시에 나를 가두는(감옥) 사물이다. 그것들은 내 몸 안에 있고 자라나는 것이다. 그것은 ‘나’가 아니다. 구두의 소유자는 ‘나’가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게워낸다. 수천 켤레의, 셀 수 없으리만치 많은, 흔적을 토해내는 것이다. 세상의 아버지는 편안한 것이고 의지할 만한 힘이 있으나 그러한 의지를 위해서는 나 스스로 약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것을 거부하기로 한다. 혼자 서기 위하여 나는 아버지를 게워낸다. 내가 게워내는 구두는 곧 아버지다. 나를 짓누르는 절대적 힘이 나를 병들게 하였으므로 나는 낫기 위하여 치유한다. 게워낸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러나 나는 수천 켤레의 구두를 ‘게워내야만’ 살 수 있다. 그래서 장석주의 시는 읽으면 아프다.


나는 거리의 수많은 사물들을 본다. 사물들은 오래된 것일수록 많은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섣불리 지난 것들을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집안의 식탁 하나를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해마다 봄철이면 이사가 잦다. 새로 집을 마련하거나 좀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구해서 이사를 한다. 그때마다 아파트 구석에는 지난 물건들이 쌓인다. 이왕 이사하는 김에 가구나 가전제품도 새것으로 바꿔보자는 소비심리의 흔적이다.

그러나 사물이 바뀌면 기억이 사라진다. 나는 쉽게 물건들을 버리지 못한다. 물건이 아까워서라기보다 물건의 기억 때문이다. 그것이 설사 나에게 고통을 준 사물일지라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 고통마저도 내 삶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은 기억을 갖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과거의 시간에 잇대인 현재의 내가 있고 그것이 과거가 되어 갈 것이므로. 그것은 ‘따뜻한 감옥’ 같은 것이다. 언젠가는 버려야 할 것임에도 쉽사리 버려지질 않는다. 아, 언제쯤 나는 그것들을 버릴 수 있을 것인가.

'마음대로 시를 읽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희중의 오늘의 노래  (0) 2013.01.04
꽃 없이 피는 열매, 무화과  (0) 2013.01.03
삶과 죽음의 넘나듦  (0) 2012.12.31
숲이 되지 못하는 나무들  (0) 2012.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