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되지 못하는 나무들의 슬픔
-'정희성'의 <숲>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짧은 시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긴 시다. 정희성 시인 특유의 따뜻한 날카로움이 베어 있는 이 한편의 노래를 오랜 만에 보고 싶은 사람처럼 보고 또 본다.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그리고, 그대와 나는 왜 ‘제가끔 나무’가 아닌가. 이 두 개의 화두를 붙들고서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는 시를 푸석한 내 마음의 책장에 꽂아둔다.
이 시는 우리 전통시의 작법을 차용하고 있다. 숲과 인간, 즉 자연과 인간이 대비되는 전형적인 구조. 숲의 ‘전형(典型)’에 가 닿지 못하는 제각기의 인간들의 삶의 차이를 붙들고 있다. 여기서 숲은 인간 삶의 원형이다. 그 원형은 ‘제각기’와 ‘전체’의 유기적 합일(合一)을 간직한, 파편화된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치로서 존재한다.
그 숲은 하나이면서 전체이기에 한없이 따뜻한 포용력을 지닌다. 개별화된 대상들은 제각기의 모습으로 부딪히지만 전체 속에 융화된 전체 속의 대상들은 서로를 껴안을 수 있다. 그 껴안음은 ‘따뜻함’이다. 따뜻함은 삶을 녹인다. 녹은 것은 융화된다. 하지만 차가운 것들은 얼어서 부딪히고 깨어진다. 시인의 숲은 따뜻하게 녹아서 융화된 세계다. 제각기의 존재성 속에 숲을 간직한 나무들이 서 있는 신성한 공간. 개별화된 나무가 숲인, 그런 공간이 ‘시인의 숲’이다.
우리는 나무다. 그런데 시인은 우리 인간들에게 왜 숲이 아닌가를 묻는다. 아, 나무가 된 우리는 이미 숲의 공간을 떠나왔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광화문’이다. 한복판에 숲 대신 거대한 문명의 추물들로 가득 찬 차가운 도시이다. 그곳에 서 있는 나무들은 이미 숲의 따스함을 잃어버렸다. 숲의 망각. 한없이 따뜻한 모태의 탯줄을 끊어버린, 추방된 자의 도시 에 서로 홀로 서서 살아간다. 따라서 시인의 그 물음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망각을 두드린다.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는 ‘그대와 나는 왜 숲을 잃어가고 있는가’와 동일하다.
그러면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우리는 왜 제가끔의 나무가 될 수 없는가. 아니 왜 제가끔의 나무가 아닌 숲의 부분으로서만 존재해야 하는가. ‘나’를 잃어버린 시대. 전체 속에서 끝없이 상실되고 추락해가는 전체성의 횡포. 전체에 길들여야만 살아남는 일상의 삶들은 또 나를 슬프게 한다.
아마도 살아가면서 가장 힘겨운 것은 ‘관계’라는 생각을 한다. 관계가 주는 상처가 지속될수록 세상은 그늘이 진다. 물론 이 ‘관계’라는 것이 힘이 되기도 하고, 삶의 동인(動因)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개별과 ‘전체라는 무형의 덩어리’와의 관계맺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실체도 없이 자신을 압박해오는 힘. 그리고 그 무형의 실체에 휩쓸려가야만 하는 개별자들의 삶이란 늘상 공허하고 두렵다.
우리는 자신의 짐이 버거울 때 그 스스로를 포기하고 숲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온전한 나무이기를 포기하고 들어간 숲은 가짜다. 숲은 나를 위안한다고 하지만, 실은 숲속에서 나는 감춰진다. 나무와 나무 사이, 타인과 타인 사이, 나는 감춰진다. 그냥 비슷비슷하게 두루뭉실하게 그렇게 나는 사라진다. 그 숲을 나와 벌판에 홀로 설 때 숲은 그 나무를 외면한다. 전체 속에서 버려지는 자의 고독. 숲을 나온 자의 외로움. 그래서 나는 홀로 있을 때보다 여럿이 있을 때 더 외롭다.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제가끔 서 있더군/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숲이었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부분이다. 제가끔 서 있는 것이 숲인 나무들. 그 나무들의 내부에는 이미 숲이 있다는 것. 그 숲이 내면으로부터 솟아나와 따뜻한 나무를 감싸는 세계. 시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숲이 주는 융화의 힘이다. 시인은 그래서 숲이 되자고 한다. 숲이 되기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숲이기를’ 원한다.
시인이 보는 이 세계는 메말라 있다. 이 시의 광화문은 그런 곳이다. 숲을 잃어버린 자들이 살아가는 도시. 그곳에서 사람들은 제 속의 숲을 잃어버렸다. 황금빛 햇살이 내리비추는 황금의 숲. 마음의 황금빛이 회색으로 추락한 곳이 이곳이다. 그래서 그곳은 삭막하다. 시인은 그래서 그곳이 숲이 되기를 바란다. 개인을 침몰시키는 숲이 아닌, 개인 속에 이미 숲을 지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라는 시인의 조용한 외침은 따라서 아프다. 상실된 것을 끄집어내는 일은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을 조용히 아프게 끄집어내는 자만이 숲이 된다. 마음 속의 황금빛 햇살을 온몸에 받은 ‘숲인 나무’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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