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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 시를 읽다

이희중의 오늘의 노래

 

 


 

심야에 일차선을 달리지 않겠습니다
남은 날들을 믿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할 일은, 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건강한 내일을 위한다는 핑계로는
담배와 술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헤어질 때는 항상
다시 보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겠습니다
아무에게나 속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심야의 초대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신도시에서는 술친구를 만들지 않겠습니다
여자의 몸을 사랑하고 싱싱한 욕망을 숭상하겠습니다
건강한 편견을 갖겠습니다
아니꼬운 놈들에게 개새끼, 라고 바로 지금 말하겠습니다
완전과 완성을 꿈꾸지 않겠습니다
그리하여 늙어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 살아 있음을 대견해하겠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견디기를 더 연습하겠습니다
울지 않겠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세계 속에 현재 존재하는 인간을 현존재라 하고, 현존재가 존재하는 그 자체를 실존이라고 하였다. '현존재가 어떻게 실존하는가는 미리 예정된 인간의 보편적 본질에 의해서가 아니고 그때그때 현존재가 실존하는 바로 그 자체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 시는 그러한 실존의 형상화이며 그러한 실존을 견디는 자의 아픈 자기고백이다.
우선 이 시를 읽으면 시인의 어조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겠-'이다. '-겠-'은 보통 추측이나 의지를 나타내는 데 이 시는 후자쪽이다. 그것도 두 개의 의미로 구분되어 대립되는데, 그것은 '않겠다'와 '하겠다'이다. 따라서 이 시는 '않겠다'를 부정하고 '하겠다'를 긍정하는 반복적인 구조로 읽힌다.
그러면 시인이 말하는 '않겠다'의 대상들을 찾아보면 시가 쉽게 읽혀질 수 있다. 그가 부정하는 중심에는 '남은 날들'과 '건강한 내일'이 있다. 이 두 말의 공통점은 미래다. 그는 미래를 부정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일상적이고 상식적인 삶이란 대개가 미래를 긍정하며 그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기꺼이 희생해 간다. 그런데 이 시는 그러한 상식적인 의미의 미래를 부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부정하는 미래란 문학평론가 홍용희에 의하면 '신기루 같은' 것이고 그것은 '정작 살아있는 오늘의 현재성을 소실'시키는 그런 성격의 것이다. 미래는 계속적으로 유예되고 우리의 현재는 그 미래에 기대며 하루하루 쓸모없이 소비된다.
그래서 이 시인은 '여자의 몸을 사랑하고 싱싱한 욕망을 숭상하'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니꼬운 놈들에게 개새끼'라고 지금 말하겠다고 한다. 그는 미래를 가장한 사회적 금기와 억압, 그리고 그러한 금기체계로 억압된 현실의 삶을 부정한다. '싱싱한 욕망의 숭상'과 '개새끼'는 '건강한 내일'이라는 허상을 부정하는 하나의 담론이다. 마치 음습한 춘화를 보며 자위를 하던 근엄한 자가 타인 앞에서 윤리와 도덕을 입버릇처럼 떠들어대는 위선과 같은 껍데기를 그는 단호히 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건강한'은 아이러니이다. 반어이다.
이 시는 부제로 '고 이균형 선생께'가 달려 있다. 젊은 나이에 죽은 이균형이라는 작가의 영전에 바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시는 결국 '죽은 자에게 말걸기'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미래를 쫓다가 현재적 삶도 잃어버리고 죽음의 세계로 가버린 요절 작가에게 바치는 시. 그의 죽음 앞에서 작가는 미래란 무엇이고, 현재의 자기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반성으로 들어간다. 그가 현재의 싱싱한 욕망과 건강함을 억제하며 살아가는 지금의 현재가 그에게는 거짓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일이라는 허상에 기댄 현재적 삶의 무책임한 실존이므로.
현재적 삶에 충실한 사람들의 삶은 대체로 건강하다. 그들의 삶은 현재의 연속선에 미래를 가져오므로 허황되거나 거짓스럽지가 않다.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욕쟁이 할머니의 삶이 건강한 것은 욕망을 순수하게 드러낼 줄 안다는 데 있을 것이다. 노동하는 자의 삶이 건강한 것은 현실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곳이 시인이 말하듯이 '어둡고 차가운 곳'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싱싱한 현재의 욕망에 미래를 잇대어 놓는다. 그들의 시간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레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그 미래는 현재적 삶의 건강함과 의지를 억누르는 거짓된 도덕성의 억압 기제가 아니라 현재의 건강한 욕망이 누적된 동일한 시간의 연장이다.
그래서 현재의 삶을 싱싱하게 살아가는 자의 얼굴은 아름답다. 그것은 진실된 '실존'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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